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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의 생각과 활동

[이문원원장의 머리카락 기행 4탄.] 우리나라의 전통 가발 "가체"

 

머리카락 기행 4탄.


우라나라의 전통 가발 “가체”




우리나라에서는 혼인하기 이전 여성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땋은 머리를 했습니다. 땋은 머리에 곁들인 화려한 장식 등에서 신분의 차이를 알 수는 있지만 기본형태는 반상이 동일했고 혼인한 이후에야 비로소 여성들은 얹은머리로 단장했습니다. 하지만 여염집 아낙네나 어물장수, 기생의 얹은머리는 그 모양과 크기가 다 달랐는데 그 차이는 바로 자신의 머리로 하느냐, 거기에 다래를 덧넣었느냐에서 생깁니다. 기생들의 가녀린 목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은  커다란 부피의 머리가 바로 가체였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다래(가체)”라는 가발이 사용되었었고, 신라의 여인들은 가발을 이용해서 머리숱을 풍성하게 보이므로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냈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도 다래를 예물로 보냈을 정도로 다래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금은보석으로 장식을 하여 멋과 화려함을 더한 가체가 유행했습니다. 가체는 양반층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층 부녀자에게도 크게 유행해서 좋은 다래로 땋아 만든 가체를 각종 행사나 명절에 한번씩 사용하는 것을 큰 자부심과 멋으로 여겼습니다. 가장 화려한 가체는 왕비가 정복차림에 얹는 떠구지머리(떠받치는 머리라는 뜻)로 다래를 7개나 얹었다고 한다. 다래 한 채에 한사람분의 머리카락이 들어가는 것을 염두해보면 왕비 본인 머리까지 합해 8명의 머리를 얹은 셈이 되죠.


  그런데 가체 구입에 너무 돈이 많이 들고 호사스러워서 말썽이 되기도 했습니다. 가체는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비쌌습니다. 조선이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유교적 사고에 의해 머리카락 하나도 소중히 여기는 사회였기 때문이죠. 가난한 선비의 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목돈을 마련했다는 이야기에서 보듯이 가체는 비싼 물건이어서 기본적인 가체를 올리는데도 황소 한 마리 값과 맞먹는 돈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그 크기가 클수록 좋은 것으로 인정받아서 가체를 마련하다 가산을 탕진한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혼인식을 올린 신부에게 가체를 마련하지 못해 시집으로 데려오지 못했다고도 하고, 가체를 올린 13살 어린 신부가 방에 앉아 있다가 시아버지가 들어와 급히 일어나다가 가체의 무게에 목이 부러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가체의 무게가 3~4kg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여성들의 사치와 유행이 심해지자 <성종실록>에도 가체문제가 거론될 정도로 사회적인 문제로 번져갔고 특히 영․정조 시대에 들어서는 급기야 가체를 금하는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결국 포도청이 가체머리를 단속했고 강력한 단속의 결과로 순조 때 이르러 기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여인의 머리 모양이 쪽진 머리로 변했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daum 백과사전)